아리스토텔레스에 끼워 맞추는 이영훈의 역사 서술-소농인가 빈농인가


이영훈 교수가 말하는 소농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족단위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자영농의 개념을 그대로 한국역사에 대입한 부분.

이영훈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어설프게나마 공부했음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도 확인이 된다.

여담으로 한국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할 때도 정밀하고 치밀하고 깊숙하게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대개 한국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대입하면서 한민족의 우월성, 혹은 한민족 우선주의를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그 이면에는 유교나 노장철학이 있기 때문.

이영훈 교수도 한민족에 많이 비판적인 것 같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유교적 무신론 및 유교적 현실주의에 기반한 근엄함과 경직성에서 못 벗어나는 역사 서술을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한국인과 크게 다른 부분이 없다 하겠다.

각설하고 더 정확히 보면 이영훈 교수가 말하는 소농은 소농이 아니라 빈농이라고 표현해야 더 정확한 부분이다.

이영훈 교수가 말하는 조선 소농들의 사례, 특히 2년 3작을 했다거나 인분까지도 악착같이 모아서 거름으로 사용을 했다는 점, 그럼에도 결국 가난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는 부분 등이 결국 조선의 소농은 소농이 아니라 빈농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그리고 최종적으로 윤리학적 관점에서 자영농을 매우 중시한 것은 맞지만 이는 조선의 소농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부농 개념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하는 부분이다.

고통스럽게 노동을 하고 중국, 일본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2년 3작을 해야할 만큼 가난에 시달렸던, 그리고 항상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여 전전긍긍하여 불확실성 회피 성향을 강화해 도전과 모험을 극도로 억압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만든 빈농들을 소농으로 치켜세우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영농 개념과 일치시키려 하는 것은 매우 불순한 어떤 정치적 의도가 느껴지는 서술일 뿐이다.

또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생존을 해야 한다는 건 더 크게 보면 부계 혈통의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는데(가난 때문에 죽어라 일을 해서 가족의 생존을 도모하는데 정작 아내가 다른 남자의 씨로 임신을 하면 애초에 생존을 도모하려는 의지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이므로) 이는 결국 매우 악랄한 가부장제를 만들게 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영농 개념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며, 소농이라는 말도 아까운 행태인 것이다.

당연히 빈농들은 여성과 자녀를 악질적으로 착취하게 되는데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영훈 교수가 제시한 서유구의 행포지의 강령이다.

1) 남이 버리면 내가 줍는다
2) 작은 비용으로 큰 이득을 본다
3) 잠간의 수고로 오래 편하다
4) 절약하여 큰 쓰임을 감당한다
5) 법을 엄하여 령을 무섭게 한다
6) 번거로움을 오래 견딘다

이것이 소농, 아니 빈농 가정의 행태라는 점에서 실소만 나오게 한다.

편안해야 할 가정을 무슨 군대로 만들어 버려 아내 두들겨 패고 자식 죽이는 걸 가부장의 정당한 권리로 알던 조선민족의 악랄한 행태, 더 나아가 가정이라는 개념조차 와해시켜버린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참고로 이영훈 교수는 조선의 가정에 대해서도 말을 한 적 있는데(https://www.youtube.com/watch?v=U51eFrKXGsI), 조선에는 가정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위계 서열에 근거한 추상적인 혈족 형태의 공동체만 있었다라는 취지로 서술을 하고 있으나 결국 그 이유가 바로 서유구의 행포지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왜 모르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

물론 이영훈 교수도 이것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고 분명 알 만큼은 알고 있을 것이라 추정하는데, 그러함에도 만약 외면했다면 학자로서의 자세가 빵점이라는 뜻밖에 안 될 것.

더 적나라하게 이것에 대해 여성들의 관점에서 노래를 한 것이 바로 조선시대 전해져 온다는 시집살이 노래인데, 이 노래를 들어보면 서유구의 행포지의 저 내용이 실질적으로는 얼마나 악랄했던지가 그대로 나타난다 하겠다.

형님 온다 형님 온다 보고 저즌 형님 온다
형님 마중 누가 갈까 형님 동생 내가 가지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뎁데까?
이애 이애 그 말 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앞밭에는 당추 심고 뒷밭에는 고추 심어
고추 당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
둥글둥글 수박 식기 밥 담기도 어렵더라
도리도리 도리 소반 수저 놓기 더 어렵더라
오 리 물을 길어다가 십 리 방아 찧어다가
아홉 솥에 불을 때고 열 두 방에 자리 걷고
외나무다리 어렵대야 시아버님같이 어려우랴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시아버니 호랑새요 시어머니 꾸중새요
동새 하나 할림새요 시누 하나 뾰족새요
시아지비 뾰중새요 남편 하나 미련새요
자식 하난 우는새요 나 하나만 썩는샐새
귀 먹어서 삼 년이요 눈 어두워 삼 년이요
말 못하여 삼 년이요 석 삼 년을 살고 나니
배꽃 같던 요 내 얼굴 호박꽃이 다 되었네
삼단 같던 요 내 머리 비사리춤이 다 되었네
백옥 같던 요 내 손길 오리발이 다 되었네
열새 무명 반물치마 눈물 씻기 다 저었네
울었던가 말았던가 베개 머리 소(沼) 이겼네
그것도 소(沼)이라고 거위 한 쌍 오리 한 쌍 쌍쌍이 때 들어오네


서유구의 행포지의 저 말을 여성의 입장에서 풀면 시집살이 노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자영농의 모습이며, 이것이 우리가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인지 이영훈 교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적으로 고찰을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의 발전에 있어서 빈농들의 윤리관, 경제관, 박정희의 정책, 정주영, 이병철 등의 기업활동 등등이 공을 세운 건 단 하나도 없다.

오로지 미국이 해준 한국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와 기술이전을 통해서만이 전적으로 발전을 한 것이다. 한국인이 잘한 건 단 1%도 없으며, 이는 우리가 조선의 빈농으로부터 물려받은 긍정적인 유산도 단 1%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조선의 빈농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생존을 위해 모든 불확실성을 제거하다보니(하지만 그러함에도 생존이 제대로 보장되지를 못했지만) 홉스테드 연구를 보면 나타나는 극도의 불확실성 회피 성향이며, 농사에 있어서 집단적인 노동을 하면서 발생한 집단주의 등등의 해로운 요소들 뿐이다.

물론 빈농들의 문화인 불확실성 회피 문화, 집단주의 문화가 제조업에서는 강점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그것도 꼭 절대적인 것만은 아닌 것.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놀랍게도 '가정'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이유에는 빈농들의 문화도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점(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더 자세히 고찰을 해보겠음), 그리고 가족이기주의가 판을 쳐서 과도한 사교육, 선행학습 등으로 이어져 오히려 국가 경쟁력의 약화, 학습능력의 저하를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들의 악행은 반드시 비판받고 심판받아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제대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어설프게 도입하고 실제로는 유교적 근엄함과 경직성에서 못 벗어났다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인 문제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이영훈 교수는 스스로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