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학계는 아리스토텔레스라도 좀 공부해라

본격 한중일 세계사 12권

<조선조가 왕권 제한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보다 민주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제한이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닌 권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 민주주의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런 걸 보면 한국의 사학계가 얼마나 수준이 낮은지 여실히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만 보더라도 그냥 조선의 유학자들은 애초에 과두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된다.

결국 정도전이니 이방원이니 하는 자들의 싸움도 따지고보면 왕정과 과두정 사이의 분쟁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보면 왜 이방원이 정도전을 그렇게 평가했는지도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과두정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알면 이방원의 속내도 간단히 알 수 있는 것.

한국의 사학계 및 동양철학계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부분들이 이런 부분들이다.

정권에 빌붙어 그들에게 통치 논리나 제시해주고 대중들을 속여 먹기 바빴으니 욕 좀 거하게 처먹어야 할 집단이다.

심지어 논어의 첫구절도 제대로 해석을 못하는(아니면 일부러 안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것이 한국 사학계와 동양철학계다.

學而時習之 不亦說呼,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때때로 배우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의 첫구절인 이것부터 한국의 사학계나 동양철학계는 제대로 해석을 못 하고 있다.

너무 뻔하고 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하지를 못하니 게을러서 못 하거나 정권에 빌 붙어 먹느라 못 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터.

저 구절을 금수저에 대입해보면 굉장히 멋진 말임에 분명하다.

먹고살 걱정이 없으니 때때로 배우면 그 얼마나 즐겁겠는가. 먹고살 걱정이 없는 자에게 배움보다 더 큰 여가는 없는 것이다.

여자, 술, 도박도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지지만 배움은 시간이 지나도 시시하지 않고 지겹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여가를 즐기는데, 내가 돈이 있으면 또 벗이 멀리서도 저절로 나를 보겠다고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쁜 일이다.

금수저의 문지방은 오라고 하지 않아도 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여가를 즐기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때로는 붕당을 조성할 위험성도 간직하고 있다.

조선에서 발생한 산림이라는 정치 형태는 이미 논어 첫구절에 그 위험성이 암시되어 있다.

이렇게 금수저가 여가를 즐기며 세상에 통달하고 가끔 벗도 찾아오며 정치에 대해 논하며 좋게 말하면 학파, 나쁘게 말하면 붕당 및 산림도 조성하게 되니, 굳이 타인이 알아주지 않아도, 즉 권세를 가지지 않아도 그 또한 군자인 것이다.

금수저에게 저 구절을 적용하면 완전히 들어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걸 흙수저에게 적용하면 무척이나 꼬이기 시작한다.

이른바 여기서 노력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당장 배가 고프고 처자식이 굶어 죽어도 배우는 즐거움을 누려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리가 없으니 스스로를 책망하고 왜 더 노력을 못하는가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또한 가난한 나를 때론 벗이 찾아오면 물론 기쁘기는 하겠으나 없는 살림에 씨암탉이라도 잡아서 대접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살림이 걱정되니, 이 또한 스스로 벗의 방문을 꺼리게 되는 이기심으로 비춰지니 스스로 괴로움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주제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군자라고 생각하니 이건 오만이자 물 먹고 이쑤시개 쑤시는 허세일 뿐이다.

이 첫구절부터가 흙수저는 절대로 실행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물론 이 구절을 뼈를 깎고 인내하고 노력하는 것처럼 호도하면 흙수저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는데에는 무척이나 편리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의 사학계와 동양철학계가 이 구절을 그토록 교활하게 왜곡하여 대중에게 전달함으로써 권력에 빌 붙는 것이겠으나...

그렇게 대중을 속여먹고 권력에 빌 붙어 처먹어서 연구비 좀 많이 타 처먹으셨는가, 학계 교수님들이시여~ 

아무튼 학계 교수님들이 배 터지게 처먹고 계시는 더러운 짓거리가 여기서 논점은 아니니 각설하고...

금수저는 배우면 즐겁고, 벗이 찾아오면 기쁘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당당하니 군자인 것이지만 흙수저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해석조차 현재 못하는 것이 한국의 한계가 되겠다.

애초에 공자부터가 어린 시절 고생을 했다고는 하지만 주나라 예법으로 장사를 해서 돈을 일구었고, 후에는 벼슬도 조금 하고 제자도 받으면서 대단한 부(富)를 일군 사람이다.

심지어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공문십철 중의 일인인 자공은 장사를 해서 부유함을 일구었다.

사마천 사기의 화식열전에 나타난 자공의 기사를 보자.

자공은 중니(공자)에게 배운 뒤 물러나 위나라에서 벼슬하고, 조나라와 노나라 사이에서 물자를 쌓아 두기도 하고 팔기도 하였는데, 공자의 70여 제자 중에서 자공이 가장 부유했다. 원헌은 술지게미나 쌀겨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후미진 뒷골목에 숨어 살았다. 자공은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기마행렬을 거느리며 비단을 폐백으로 들고 제후들을 찾아가므로 가는 곳마다 왕들이 몸소 뜰까지 내려와 대등한 예로 맞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체로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자공이 공자를 앞뒤로 모시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세력을 얻어 더욱 드러나는' 일 아니겠는가?

김원중 역, 민음사,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 中


이렇게 비록 벼슬은 하지 못해도 부유함이 있는 공자의 입장에서 저 구절을 해석하면 완전히 다른 해석이 되게 된다.

공자가 벼슬을 못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먹고살 걱정은 없는 사람의 삶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금수저가 여가를 즐기는 방법은 물론이거니와 돈은 있는 자들이 벼슬을 못할 경우 어떻게 붕당 및 산림을 조성하여 왕을 견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매뉴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자칫하면 과두정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것이며, 유학이 추구하는 정체가 왕정인지 과두정인지 하나하나 파고들어가봐야 하는 것.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없으면 유교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한국 사학계와 동양철학계는 정권에 아부 좀 그만 해처먹고 지금 당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라도 펼쳐보기 바란다.

덧글

  • blublak 2021/12/09 20:07 #

    여담이지만 성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 비슷하다는 주장이 있더군요
    오죽하면 구한말 성리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긍정적으로 볼 정도
    디시에서도 이런 글 나왔는데 이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https://gall.dcinside.com/alternative_history/86344
  • 엑셀리온 2021/12/09 22:09 #

    이건 도올 김용옥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일견하기에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차이도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결국 현실과 이데아의 대립에 있어서 이데아를 인정했고, 이는 일견하기에 성리학과도 비슷해 보입니다만...

    그러함에도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을 도외시한 적은 없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사실 님이 제기한 문제는 불교나 유교에서도 동일한 논리 구조를 가집니다.

    소승불교에서 열반을 추구하는 아라한은 곧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추구하는 것이고, 열반이라는 이데아가 아니라 현실로 내려와 중생을 다 구제할 때까지 성불을 안 하겠다는 보살. 이는 곧 사실상의 성불 포기 선언인데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또 보살들이 열반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결국 이데아를 인정한 것과 똑같은 맥락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소승불교의 아라한이 이데아를 추구하는 플라톤적 세계관이라면 대승불교의 보살은 현실을 추구하는 보살. 하지만 그러함에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데아를 포기하지 못했듯이 보살 역시 열반을 포기하지 못함.

    불교의 경우 이렇게 정리가 되는데 이는 유교에서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부분이며, 애초에 공자의 복심이 안연에게 있었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안연은 가난을 즐긴다=현실에서 벗어난 이데아의 추구

    이미 유교의 시작에서부터 이데아와 현실세계의 대립과 합일에 대한 논의는 시작된 것이죠.

    하지만 그러함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세계 중시라는 것이 가볍게 치부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유교 및 성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플라톤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문제는 플라톤은 어차피 현실세계에서 인간들이 이데아를 구현하는 건 불가능해라는 입장이라면...

    불교에서는 이데아를 현실에서 구현하여 일체지자가 된 부처님이라는 존재가 상정되고...

    유교에서는 현실세계에서 구현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것은 금수저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다, 라는 인간을 긍정하는 용기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유교도 굉장히 훌륭한 철학이자 정치체제이며 따라서 우리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문제는 유교의 그것은 결국 금수저에게 해당된다는 것.

    사실 제가 보기에 미국도 비슷해서, 출세의 과정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하지만 출세해서 금수저의 반열에 올라서면 플라톤으로 갈아타는 걸로 보입니다.

    금수저한테는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이 어찌보면 좀 천박하게 보일 여지가 크기도 하니까요.
  • 엑셀리온 2021/12/09 22:21 #

    구한말 성리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좋게 평가한 이유는 역시 어쨌든 성리학이든 원시유교든 백성들의 삶에 대한 고민을 외면할 수는 없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 중시 세계관에는 누구든 공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슬람 성직자들이든 중국 공산당 당 간부든, 김정은이든 헐리웃 영화 좋아하고 몰래 숨어서 서구 포르노에 푹 빠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요...

    이데아 외치는 새끼들이 정작 뒤에서는 온갖 꼼수 부린다는 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 아카데미아에 배신감 느낄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라...

    어쨌든 이 현실 중시 세계관이 바로 헐리웃 영화가 전세계에 통용되는 이유.
    구한말 성리학자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고개를 끄덕끄덕한 이유.

    같은 맥락인 것...

    아무리 이슬람이든 우리민족끼리든 뭐든 그런 걸 외치며 배고파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들의 이데아를 지키겠다, 우리에게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고 해봤자 헐리우드의 현실 중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의 영화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죠.

    성리학, 이슬람, 우리민족끼리, 중국 공산당 등이 헐리우드 영화를 조금 허용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차단 모드로 들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구한말 아리스토텔레스에 고개를 끄덕끄덕한 성리학자들도 정작 진짜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이 한국 사회에 퍼지면 급당황해서 차단 모드로 들어갔을 확률이 높습니다.
  • 엑셀리온 2021/12/09 22:27 #

    보편은 사물에 내제된 채 실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성리학이랑 코드가 좀 잘 맞는 듯

    --> 이건 제가 보기엔 오히려 양명학의 치양지와 더 코드가 맞다고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외부의 관찰을 중시한 성리학과 통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텍스트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오히려 정반대라고 볼 여지가 더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에 대해 자세히 분석 및 설명을 하는데, 그 결론을 가만히 보면 이러한 중용의 덕이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해서 끌어내자, 라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심지어 야만인들에게 진정한 용기란 있을 수 없고 문명인에게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성리학의 격물치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건 성리학보다는 오히려 양명학의 치양지라고 봐야하죠.
  • blublak 2021/12/10 22:26 #

    공자와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정치할 자격이 있는 사람만 정치해라고 했지. 민주정, 군주제, 귀족정 중에 뭐가 좋다고 말한 적은 없죠.(맹자가 능력이 없는 정치인은 당장 물러가라고 하거나 순자가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있어도.)
    반면 플라톤은 이상 국가의 모습, 교육 방식에 대해 엄청 체계적으로 묘사하지만요.

    *추신
    참고로 맹자, 순자, 장자, 묵자, 양주 모두 공자의 영향을 받아서 서로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하네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 아무리 플라톤과 의견이 달라도 그의 영향을 받아 여러 학문을 창시했다고 하고요.(이 때문에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 보고 칭찬 했다고 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한발짝 앞선 자라고 평가하네요.)
    그리고 그리스 철학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까지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 엑셀리온 2021/12/11 00:12 #

    아리스토텔레스가 절대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희한한 사람입니다.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출발을 했고, 그도 이데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것도 맞습니다.

    불교의 경우, 특히 대승불교는 그냥 그 자체로 아리스토텔레스 불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보살 사상 자체가 현실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촉발되어 성불(이데아)을 미루고 땅으로 내려온 것이니 보살이야말로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실현자인 셈입니다.

    당연히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물론이고 후대의 유교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양명학이 대표적이라고 보고 그 외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입받을 때 중국은 항상 번영했습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을 받아들이면 개인이든 국가든 다 풍요로워지고 흥성합니다.

    세계의 패권은 달리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의 이동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돕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이는 자가 항상 승리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

    문제는 한국인들이 효도를 내세워 자식에게 갑질하고 싶고, 혹시라도 자식이 출세하면 자식돈 뺏을 궁리를 하느라 아리스토텔레스를 못 받아들인다는 것.

    한국인은 반성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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