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미국에 15년째 살고있는데 솔직히 서양인들이 더 정이 많음
베푸는 것이 무엇인지, 시민의 우애라는 것이 무엇인지 등등.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보면 알 수 있는 것들.
유교가 덕을 베푸는 것에 대해 항상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걸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 각론이 전혀 없어서 감을 잡기가 힘들고, 특히 금수저가 아닌 빈농 흙수저들은 절대 덕을 베푸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는 것이 불가능함.
아무튼 베푸는 것이 무엇이고 친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어디까지 베풀어야 하고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 자세한 각론이 필요.
그래야 여기서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와 덕목이 나옴.
유교에서는 이걸 말하지 않고 있는데, 논리적으로 깨닫는 게 아니라 직관적으로 깨달으라는 뜻.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1 ,2, 3부터 차례로 배우는 거라면 유교는 1과 2를 생략하고 3, 4, 5로 점프해버리는 형태를 취함.
3이라는 부분(베풀어야 한다는 덕목도 이 3에 해당)이 겹치기는 하지만 1과 2가 없기 때문에 동양철학은 감을 못잡고 헤맬 수밖에 없음.
도올 김용옥은 이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친구들의 숫자까지 정해놓는, 쪼잔함을 보였다고 말하는데 이런 세세한 각론을 말을 안해주면 금수저, 그것도 꽤나 총명한 금수저가 아니면 감을 전혀 잡을 수가 없음.
또한 유교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평등한 관점에서의 시민간의 우애와 친애가 아니라 윗사람의 덕행으로 아랫사람을 보호하고, 지배자의 덕으로서 아랫사람을 교화시키고 다스리는 것에 치중.
이는 애초에 유교의 가르침이 사회구성원 전체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금수저들의 처신과 처사, 성공, 통치 등등을 위한 학문이기 때문.
그래서 한국인들은 오지랖은 있지만 시민의 우애는 없음. 왜냐하면 항상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형태이므로.
그러니 한국인들은 항상 자신이 위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고, 서열에 민감하며, 자신이 권력을 쥐었다 싶으면 바로 안면몰수하면서 갑질을 일삼게 되는 것.
하지만 시민들끼리 서로 협력하고 우애를 나누고 지배층의 압제에 대해 저항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음.
결과적으로 한국사회가 폭력적으로 되는 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며 이러한 한국인의 야만스럽고 포악한 속내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군대 내무반.
그 외에도 폐쇄적인 공간, 장소 등등에서는 예외없이 한국인의 민낯이 바로 드러남.
북한만 보더라도 이것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
우리가 근대화에 실패한 건 다 이유가 있음.
시민간의 우애가 없으므로 애초에 근대화를 할 수가 없었음.
그저 서양 싫다는 민중 야만인들의 인종주의 및 서양혐오에 의거한 폭동과 지배층의 타락만 난무하여 멸망한 것이 구한말의 실체.
한국인의 썩어빠진 정신상태를 고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함.
동양에서도 이미 이 문제가 진작에 나타나고 있어서 양명학, 고증학이 차례로 나옴.
양명학에서는 유학의 경전들을 다 불태워버리자고 했고, 그래도 그건 너무한 게 아니냐면서 공자의 진짜 진의가 무엇인지 그 시대상황과 생활환경, 정치와 경제의 환경 등등을 자세히 고증해보자는 의미에서 고증학이 출현함.
양명학과 고증학의 전통도 빈약한 한국이 유교적 교조주의로 가면서 사회가 지나치게 엄숙주의에 물들어 경직되는 건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엄숙주의가 시민들의 우애를 크게 훼손하고 있는 것도 분명함.
또한 박정희의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 단속, 중동 파견 나간 남편을 둔 유부녀에게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엄숙함을 강요한 박정희 체제에도 이러한 엄숙주의가 심각하게 스며들어있고, 결국 박정희는 시민들의 우애를 크게 훼손한 독재자일 수밖에 없음.
덧글
<우리가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말의 의미는 구한말에 국한된 말입니다.
다만 지금도 근대화를 완전시 실현했느냐라는 질문에 확실히 그렇다라고 대답하기는 어렵고, 따라서 정확히 보자면 아직 한국인은 근대화로 나아가는 중이라고 봐야겠습니다.
박정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근대화의 진행을 앞당긴 측면이 있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방해한 요소가 분명히 큽니다.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 단속, 중동 파견 남편의 아내들에 대한 카바레 단속 등등.
이는 무슬림 남성들이 수염을 기르지 않으면 단속의 대상이 되고, 무슬림 여성이 히잡을 쓰지 않으면 처벌을 받으며, 무슬림 유부녀들이 간통을 저지르면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을, 여성을 가부장권력자, 혹은 가부장권력자의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국가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것으로서, 이는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부속품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시민의 우애를 철저히 짓밟은 만행입니다.
서양인들의 식사 매너를 비롯한 상류층의 매너, 문화 등등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에서 나왔음은 저도 인정합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여주인공이 이러한 상류층의 생활에 숨이 막혀서 배에서 내린 후 어머니를 외면하고 도망가는 장면이 나오죠.
이런 부분이 아주 전형적인 앵글로색슨족이 아리스테텔레스를 정통으로 계승한 부분이라고 봅니다만...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어서 살펴보면 그 내면에 유연성과 부드러움도 있습니다.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연성과 부드러움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라고 봅니다.
저는 배트맨 비긴즈 외에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작품 전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인함과 유연함을 동시에 잘 보여준다고 평가합니다.
한국의 엄숙함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엄숙함과는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에서 아내에게 옛 첫사랑의 추억이던 노비가 찾아오자, 남편이 노발대발하면서 아내를 자살로 몰아넣는 잔인함과 포악함이 나옵니다.
이러한 엄숙함에 대한 강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는 결이 명백히 다르며, 박정희에게서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역시 이러한 잔인하고 포악한 엄숙함을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빈농 출신인 그였기에 더 그러했을 것이기도 합니다만...
하지만 야만인이 문명인을 흉내내봤자 그건 흉내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무리 야만인이 문명인을 흉내내봤자 내면에는 여전히 야만인의 흉측함이 꿈틀거릴 뿐이고 그 야만인적인 흉측함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빈농이 빈농의 속성을 당장은 감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빈농의 그 흉악한 민낯이 드러납니다.
바람피웠냐고 따지는 육영수 여자에게 재털이를 집어 던져서 육영수 여사의 눈을 멍들게 만든 것에서 이미 그것이 그가 문명인을 흉내냈을 뿐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사생활에 그치지 않고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 단속, 중동 파견 부인들이 애용하는 카바레 단속이라는 권력으로 확대되었을 때 더 이상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육영수 여사에게 재털이를 던져 육영수 여사의 눈을 멍들게 만든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엄숙함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유부녀들 카바레 단속하고, 장발 단속하고, 미니스커트 단속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유교적이기도 하고 이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님의 논리로 따지면 무슬림들이 남자에게 수염 기르게 하고, 여자에게 히잡을 씌우고, 유부녀가 간통하면 째칙으로 후려치는 처벌을 하는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엄숙함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야만인도 용감하고, 야만인도 엄숙하고, 야만인도 베풀 수 있을 수는 있으나, 그것은 진정한 용기도 아니고 진정한 엄숙함도 아니고 진정한 베풂도 될 수 없습니다.
박정희의 장발, 미니스터트, 카바레 단속이 무슬림과 동일한 것은 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박정희는 국기에 대한 맹세문에서도 당초 초안과 다르게 변경을 하였고, 이는 명백히 인간을 부속품으로 보는 매우 잔인한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엄숙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그건 진정한 엄숙함이 아닙니다.
미국의 국기에 대한 맹세가 바로 진정한 엄숙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똑같은 단속 삼종세트(?)인데 다르다라고 외치는 것이 애처롭군요.
적당히 하세요.
뻔히 보이는 동일한 인간들을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꼴이 참으로 딱하십니다.
감정의 뇌가 아니라 이성의 뇌도 좀 쓰시기 바랍니다.
님의 논리에 따르면 언론사가 보도한 정치 뉴스는 전부다 풍문이겠군요.
그리고 과장한 것도 전혀 없습니다.
우선 님이나 뻔히 보이는 걸 눈 감고 아니라고 외치는, 스스로를 속이는 비열한 행위를 중단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어쩌면 무슬림만도 못하지요. 무슬림은 나름 전통에 근거했다면 박정희의 그것은 전통에도 개혁에도 어긋나는 근본도 없는 급조물이었으니까요.
님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했다면 절대로 박정희를 옹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박정희를 옹호하는 그 태도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박정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약간은 알고 있었다는 흔적이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욕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를 한국인이 아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고 전통문화를 더 우선시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가 한국사회에 아리스토테레스를 전파하기 위해,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씨를 뿌리기 위해 어떤 행동이나 정책, 지원을 한 것은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님의 말대로 박정희가 전통유교, 전통문화보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측면을 갖추고 있었다라고 한다면 박정희는 더 최악의 리더라는 소리밖에 안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알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한국인으로부터 차단시킨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걸 지적하자 닉네임이 댓글쓴 내용과 같지 않냐고 눈앞에 보고서도 거짓말하는 뻔뻔함도 박정희가 가르친걸까요?
그래서, 닉네임은 반박할 수 있어요?
박정희와 무슬림이 동치된다는 팩트에 반박할 수 없으니 전혀 상관없는 닉네임 물고늘어지면서 개독이나 박멸하러 가세요 라고 도망쳤다고 바로 이 답글에서도 자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신저를 물고늘어진적 없다고?
설마 제가 이승만과 박정희의 해악이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한것때문인가요?
박정희는 무슬림, 문재인은 탈레반 여기 어디에 메신저에 대한 공격이 있는지?
동양에서는 일본 정도?
지금으로서는 일본이 그나마 동양적인 문화에서 빨리, 일찍, 비교적 많이 벗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양명학이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가교 역할을 해준 것으로 보임.
그리고 현재 일본사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양명학과 성리학의 대립은 여전히 지속 중.
상인 전통의 양명학과 일본 관료 전통의 성리학이 묘하게 불편한 듯 하면서 또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공존하는 형태임.
일본 관료 사회가 점잖은 것 같으면서도 일본 코메디를 보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봄.
다만 일본은 양명학 필터로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해석한 부분도 있는데, 이것이 어쨌든 근대화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을 것임.
한국은 아직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성리학 필터로 해석하고 있어서, 학계에서도 가는 곳마다 이상과 현실 중 이상을 무조건 더 우선시해야 한다는 식으로, 성리학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음.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를 오히려 플라톤스럽게 해석하는 것으로 보며, 참으로 못 말리는 한국인들의 성리학 사랑이라고 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함.
정말로 이슬람국가에서 율법으로 시민들을 억압하는것과 똑같습니다.
그 괴물에게 잡혀먹힌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피가 거꾸로 솟아야 인간입니다
이승만의 엄숙주의는 빈농의 경박함과 천박함이 넘쳐나던 당시 한국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봅니다.
문제는 박정희의 엄숙주의였는데, 물론 김일성과 586의 엄숙주의보다 못한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 해악이 적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586의 현재 엄숙주의의 뿌리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것을 옹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엑셀리온/어떻게 필요한데요?
박정희가 치마길이 검사한것처럼 직접 그것을 주입하고 강요했나요?
통제하고 조직했나요? 이렇게 행동하라고 지시했나요?
사람죽이고 굶기는거 말고 뭘 했는지...
그렇게 따지면 한국사회의 빈농적 천박함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위에서 제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에서의 한 일화를 언급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박경리가 당시 한국농촌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일들을 소설로 녹여낸 것이죠.
너무 엄숙주의로 가는 것은 당연히 경계해야 마땅하나 그렇다고 또 엄숙주의가 아주 없어져야 한다면 그 또한 곤란할 것입니다.
이승만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이러한 빈농적 천박함에 대한 일관적인 경멸입니다.
이것을 미국물 먹은 오만한 이승만이 한국인을 무시했다는 식으로 호도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당대에 필요했다"라는 말이 나오려면 박정희가 그랬듯이 "직접 무언가를 했다"라는 말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주민번호나 경범죄처벌같이 박정희는 직접 체감할수는 있었지만 이승만은 기억조차 안나는 이유가 뭘까요?
박정희 아래서 한국사회는 그의 입맛대로 변화했습니다만 이승만 아래서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이걸 이해할 부하들도 없었고요. 이승만 혼자서 어떻게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제가 그 당시로 타임머신 타고 가서 대통령이 되도 이승만 이상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방법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이승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걸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라면서 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하들은 유교적 관료주의에 입각한 뇌물 관행과 유교적 엄숙주의로 계속 삽질을 하고 있고...
리더와 그 밑의 관료들도 뭘 서로 알아들어야 일을 하죠. 손발이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은 이러이러한 의미에서 이렇게 하고 싶은데 그 밑의 부하들은 유교 필터를 한번 걸쳐서, 거기에 뇌물 욕망까지 더해져서 일이 실행이 되니 이건 뭐 도저히 방법이 없죠.
그걸 감안하면 박정희가 왜 그랬는지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제가 박정희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씨를 뿌려놓는 한가닥의 희망은 만들어놨을 겁니다.
박정희에게서는 이게 안 보인다는 것이죠.
물론 이승만이 권력을 잡는 순간부터 그의 엄숙주의는 한국사회를 오염시켰지만, "~한 한국사회를 ~하지 않게 당대에 바꾸려면 필요했다"라고 주장하려면 박정희의 엄숙주의처럼 직접적인 조치가 있어야지요?
이를테면 이승만은 개빠였음으로 개고기를 금지시켰었는데, 그게 현재의 대한민국이 개한민국이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하면 모르지만 "당시 한국사회에 필요했다"고 하면 말이 안되지요.
당시 한국사회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니 필요하면 뭐합니까? 아무것도 바꾼게 없는데.
무능하다는 소리밖에 더 됩니까?
망치는것도 재능이군요.
하지만 그러함에도 씨를 뿌려놓기는 했습니다.
또한 그 씨를 이제 곧 발아시켜 본격적으로 키우겠다는 의지가 한국사회에 표명되는 중이었고, 이러한 움직임에 한국의 지배층과 빈농층 모두 불안해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불안함은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결국 불안함을 못이긴 지배층과 빈농층에 의해 이승만은 축출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무너진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그렇게 뿌려놓은 씨는 죽지 않고 살아서 70년의 세월 동안 한국사회에 조금씩 싹을 내렸고, 아직도 내리는 중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그러한 부분을 평가해야겠죠.
"어떠한 상태를 바꾸기 위해 당시에 필요했다"라고 하려면 박정희의 그것처럼 즉각적이어야죠.
당시 민중들이 이러한 면에서 딱히 변화를 체감했었나요?
하지만 대중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리더의 사상이나 행동만 보고도 그 의도를 기가 막히게 꿰뚫어보는 진실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엄숙주의로 본 피해는 실제로는 그 부하들에 의해, 혹은 한국의 관료들에 의해 유교적 필터로서 한번 걸려진, 유교적 엄숙주의와 빈농층의 천박함이 함께 다 결합된 기괴한 엄숙주의였습니다.
그걸 온전히 이승만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잘못과 결함을 은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는 성공했고 이승만은 실패해서 쫒겨나고...
적어도 "당시에는" 말이죠.
그런의미에서 이승만 옹호는 네오나치보다도 더 저질입니다.
차라리 박정희야 국민들도 암묵적 동의를 했으니 히틀러 치하 독일인처럼 책임이 있다고 하면 모를까 이승만 치하 한국인은 일방적인 피해자였는데 이걸 피해자 탓하는게 말이 됩니까? 강간피해자가 옷을 야하게 입어서 책임이 있다고 하는 수준입니다.
민주주의에서는 피지배층에게 오히려 더 책임이 큰 겁니다.
이게 바로 한국 빈농층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문제의 절반이 자신들에게 있는데 왕정의 사고방식으로 전부다 위로 떠넘기는 행태.
나라에 농사가 안 들어도 대통령 탓이라는 한심하고 정신상태가 썩어빠진 빈농들.
각종 공사의 안전사고에서 늘 부주의하고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는 노동자의 책임도 절반이 있지만 항상 피해자 행세를 하면서 관료와 자본가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선동하는 노동자들.
과연 피해자라고만 할 수 있는 걸까요?
더군다나 한국의 대중들은 구한말 시절 서양 혐오증에 걸려서 걸핏하면 서양 세력 물러나고 우리끼리 살고 싶다며, 그리고 유교적 가부장제를 통한 한줌도 안 되는 권력인 가족에 대한 소유권(빈농까지도 아내랑 자식을 팔아넘길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음)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명백한 가해자입니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염전 섬노예 등등에서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죠.
독일 국민은 히틀러를 지지했지만, 한국의 빈농층은 한줌도 안 되는 가부장권력을 지키려고, 그 가부장권력으로서 아내랑 딸 팔아먹고, 자식 팔아먹고 싶어서 서양문명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수백년 동안 그러한 권력을 움켜쥐고 온 이 빈농층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대상이지 절대로 일방적인 피해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 악행의 악질성도 히틀러를 지지한 독일 국민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습니다.
서북청년단은 스윗한 페미니스트였네요
야만인은 다 야만인일 뿐이죠.